보통 재즈의 발생지를 루이지애나주에 위치해 있는 도시 뉴 올리언즈로 보는 것은 재즈가 초기에 가장 활발히 연주되던 대표적인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재즈는 어느 시기, 어느 곳에서
발생한 음악이라고 단정짓기 보다는 흑인 노예제도가 성행한 이래로 수십년 동안 점차적으로 발전된 음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재즈라는 이름을 갖게 된 시기나 그 어원도 정확히 알 수가 없으나 흑인 영가,
블루스, 노동요 등은 미국적 민요에 유럽의 민요나 오락음악, 군악대 음악의 기법을 첨가하여 전문 음악가들이 연주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재즈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Civil War,1861-1865)이후에 군대에서
악기를 불하 하여 악기가 시중에 많이 퍼지게 되었고, 프랑스인과 흑인 노예의 혼혈인 크레올(Creole)이 대거 참가하여 많은 악단이 생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크레올은
피부가 흑인보다 밝고, 교육을 받았으며, 프랑스어로 말을
하였다고 하는데, 경제나 사회적으로 흑인보다 우세 하였으므로 노예해방 이후(1865) 흑인들에게서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흑인의 단순한
형태의 음악에 유럽적인 기법이 침투하게 되었으며, 악기편성은 군악대편성에서 차차 소편성의 밴드중심으로
나아가긴 하였으나 여전히 취주악기가 그 주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재즈의 특징으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크레올과 흑인들은 길거리나 공원, 결혼식, 장례식, 피크닉, 카니발
등에서 연주를 하였으며, 1900년대에는 댄스홀이나 술집에 고용되어 연주를 하였습니다. 특히 뉴 올리언즈의 홍등가인 스토리빌 (Storyville)에서는
랙타임 피아니스트와 소편성 밴드를 고용하여 손님을 접대하였으므로 흑인 음악가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초기에는 재즈란 이름으로 연주한 것이 아니나, 최초의 재즈밴드로
알려진 것은 버디 볼든(Buddy Bolden- 트럼펫, 코르넷)의 밴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곧 백인들이 모방하여 댄스음악으로
연주하는 악단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는데(1910년 경부터) 이들
중에서 니크 라 로카(Nick La Rocca,트럼펫)가
이끄는 "오리지날 딕실랜드 밴드(Original
Dixieland Band)"가 1917년 최초로 레코드 취입을 하여 재즈가 드디어
미국 전역으로 퍼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뉴 올리언즈 재즈의 음악적 특징
뉴 올리언즈 재즈는 1900년에서 1925년
사이가 전성기이고, 대표적인 음악가로는 버디 볼든(Buddy
Bolden, 트럼펫), 벙크 존슨(Bunk
Johnson, 트럼펫), 죠 킹 올리버(Joe King
Oliver, 트럼펫),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트럼펫), 키드 오리(Kid Ory,
트럼본), 젤리 롤 모튼(Jelly Roll
Morton, 피아노), 그리고 백인 밴드로 "오리지날
딕실랜드 재즈 밴드(Original Dixieland Jazz Band)"와 "뉴 올리언즈 리듬 킹즈(New Orleans Rhythm
Kings)"등이 있습니다.
악기 편성은 백인의 군악대를 본 따왔기 때문에 멜로디 악기로 트럼펫, 클라리넷, 트럼본 등의 관악기를 편성하고, 리듬악기로 드럼, 벤조, 기타, 튜바, 그리고 피아노, 콘트라베이스가 추가되어 구성을 이룹니다.
연주 형태는 흑인 음악가들이 악보를 읽을 줄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순전히 청력에 의해 연주하는 경향이 짙어졌습니다. 이들은 12마디의 블루스나 32마디의
노래나 랙타임을 주제로하여 각 구성원이 제작기 동시에 즉흥적으로 연주하였으며 이를 가르켜 "집단
즉흥 연주(Collective improvisation)"라고 일컫습니다. 리듬 형태는 단순한 2박자(한
마디에 2박이 들어가고 첫박에 악센트가 있다) 재즈가 성행하였습니다.
이 시기의 재즈 특징은 시대가 변하여도 영원한 재즈의 특징으로 전승되게 된 요소들이 많은데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랙타임이란 재즈를 낳은 여러 요소중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미국에서 유행하고, 1910~1915년에 그 절정을
이루었던 미국의 대중 음악 양식을 말합니다.
화성은 장,단조의 1도, 5도, 4도 화음이고 왼손 반주부는 2박자, 오른손은 예리한 싱코페이션을 가진 멜로디를 연주를 합니다. 이 음악 형태는 이름 자체만 들었을 때는 매우 낯설게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우리들이 많이 들어본 친숙한 음악이기도
하지요. 1973년에 스팅(sting)이란 영화에 쓰여 매우
유명해진 곡인 엔터테이너:The
Entertainer가 대표적인 예 입니다.
랙타임은 피아노 독주곡으로 째즈가 자리잡기 전의 초기 스타일을 지칭하나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습니다. 그러나 랙타임이 째즈던 아니던 째즈의 발생에 많은 영향을 준 것만은 사실입니다. 'Ragtime'이라는 이름은
'Ragged Time'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여기서 Ragged란 말은 단어 자체로는 'Uneven(정확히 들어맞지 않은)'이라는
의미로 사실 서양적인 싱코페이션(syncopation)과는
조금 다릅니다. 음표들을 정확히 박자와 박자 사이에 놓는 것을 서양적 싱코페이션 이라고 한다면 이들을 박자보다 조금 앞이나 뒤에 놓는 것이 바로 랙타임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이 Ragged의
일반적인 효과는 멜로디를 정규 박자에서 벗어나게 하여 마치 그것이 박자와 박자 사이에 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겁니다. 이는 복합적인 리듬을 가진 아프리카의 드러밍에서 기원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늘날 랙타임의 전형이라고 보이는 것들은 사실
오랫동안 발전된 여러 가지 형태의 음악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후대 사람들은 고전적인 피아노 랙타임만을 기억하는데 이는 고전적 피아노 랙타임이 째즈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반면에 랙타임 노래들은 후
대중음악의 전통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랙타임은 피아노의 측면에서 볼 때 19세기 유럽음악을 흑인들의 리듬 감각과 역동적인 연주방법을 반영합니다.하지만 그 당시에는 백인 연주자들도 흑인 연주자 못지 않게 뛰어난 ragtime연주자들이 많아서 음악만
들어보아서는 누가 흑인이고 누가 백인인지 구분하기 매우 어려웠다고 합니다.
Ragtime이 널리 퍼지게 된 때는 '랙타임의 황금기(Golden Age of
Ragtime)'였던 1900년 대부터 세계 제1차
대전 전까지로, 오늘날 랙타임의 아버지(King of
Ragtime Writers)로 불리우는 Scott Joplin, James Scott, Joseph Lamb에 의해 그 고전적인 형태가 확립되게
되었습니다. Joplin은 'AABBACCDD'로 표현되는 랙타임의 구조와 형태를 확립하여 대다수의 랙타임 작곡가들이 그 형태를 따르고
있습니다.
2.랙타임(Ragtime)과
뮤지션이야기
RAGTIME의 역사는 대표적인 연주자인 Scott
Joplin의 삶 속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Joplin이 뛰어난 랙타임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Joplin은
그 합류점이 Euphonic Sounds로 발전한 여러 요소들을 직접 경험하였기 때문이죠. 이는 세기말 미국 뿐만 아니라 유럽인들에게도 음악적인 즐거움을 안겨다 주기도 했습니다.
랙타임의 탄생은 일반적으로 첫 랙타임 곡이 발표된 날로 정하고 있습니다. 1895년 Ben Harney는 Louisville에서 "You've Been a Good Old Wagon"을 발표하였구요, 이 사람이 훗날 New York City에서 랙타임을 대중화시킨
사람입니다. 첫 instrumental ragtime은 1897년 1월 발표된
William Krell의 "Mississipi Rag"이었습니다. 그러나 흑인 instrumental ragtime이 출판되기 시작한
것은 1897년 말 Tom Turpin의 "Harlem Rag"이 발표되면서 부터 였습니다. 이미
행진곡과 왈츠곡들을 발표한 적이 있던 Scott Joplin은
1899년 Original Rags를 발표하였습니다.
하지만 Ragtime의 역사를 단지 출판된 곡들로만 비추어 보는 것은 오해를 일으킬
소지가 많습니다. 이 관점에서 랙타임의 탄생을 보면 백인이 랙타임을 확립시킨 선구자였고 최고의 랙타임은
출판된 형태로만 존재하였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흑인들은
Krell의 오케스트라 이전부터 랙타임을 연주해 왔고 이를 통해 받은 팁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출판가들이
그들의 생동적이고 율동적인 곡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때 조차도 그들은 술집이나 무대에서 연주를 해 받은 팁으로 충분한 돈을 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을 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랙타임 곡의 첫 출판이 랙타임의 탄생을 말하는
것이라면, 정교하고 명랑한 대부분의 랙타임 곡들이 단지 작곡가 자신들 또는 소수의 즐거움을 위해 무대
뒤에서 연주되었던, 긴 임신 기간이 있었던 셈이죠.
랙타임의 음악적 뿌리는 미국 플랜테이션 생활 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멋진 옷을 입은
커플들이 춤을 주고 그 중 최고의 커플이 케익을 차지하는 Cakewalk가 그들이 즐긴 놀이 중 하나였습니다.
l대표적인 뮤지션
스콧 조플린(Scott Joplin), Piano, Composer
1865년 12월 24일 텍사스주 출생 1917년 4월 11일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킹 오브 랙타임>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로, 어렸을때 피아노를 독학하였다.
11살때 독일인 피아노 교사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10대에 고향을 떠났습니다. 1885년부터 '93년까지
세인트루이스에서 살면서 음악활동을 하였구요. 로컬 캬바레와 살롱에서 연주를 하였고 1894년부터 시카고로 이주하여 연주하였습니다. 같은해 '텍사스 멜로디 쿼텟'이라는 자신의 밴드를 결성하여 자신의 곡을 소개하기 위해 미 국내를 돌아다니면서 연주를 하였습니다. 이후 1896년 조지 스미스 칼리지에 입학하여 랙타임에 대한 연구를
하기도 했구요. 그 후 자신이 직접 랙타임을 구사하기 시작하였고, 그의
랙타임은 세들리아의 홍등가에서 히트되기 시작했습니다.
3년뒤에는 랙타임 오페라 < 더
게스트 오브 오너 >가 만들어졌지만 출판되지 못했습니다. 그때
작곡된 랙이 후에 유명해진 < 이지 위너즈 >, < 엘리트
싱코페이 션 >, < 디 엔터테이너 >입니다.
1907년에는 세인트루이스, 시카고를
거쳐 뉴욕으로 진출, 로티 스톡스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조플린은 곧 매독으로 쓰러지고 1910년에는 연주가 불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감추어 은둔생활을 하였고 오랜 기간 친구였던 출판업의 스타크와도 로얄티 문제로 절교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후 죽기까지 3곡의 랙을 작곡하였고 랙타임
오페라 < 트리모니샤 >도 마지막 수년간을 소비하며
작곡하였습니다. 1915녀에는 마지막으로 시험삼아 오페라를 위해 프로덕션 기금을 만들었지만 누구에게도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고 자신의 건강도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계속될 수 없었습니다.
1916년에는 맨하튼의 워즈 아일랜드 병원에 입원,
다음해인 1917년 에이프릴 풀에서 생일 마갑했습니다. 말년에
녹음된 조플린의 연주는 음도 엉망이고 상당히 부끄러운 음악들 이었습니다.
'70년대 영화 < Sting >의
주제곡으로 다시 리바이벌된 < The Entertainer >의 인기로 다시 스콧 조플린의
랙타임 연주들이 붐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블루스 (Blues)는 미국 노예 해방 이후 구체화 된 노동가 또는 민요 형식 속에
흑인들이 자기를 표현하는 음악 형식으로 발전된 음악을 말합니다.
또한 블루스는 재즈를 기본 바탕으로 두고 변화한 음악 형태 이기도 합니다. 미국
노예 시대 흑인들의 노동가나 필드 홀러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들과 스피리츄얼스 등 주로 집단적으로
불리던 소박한 민요가 개인이 부르는 노래로 바뀌어 블루스가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초기의 블루스(Pork Blues , Country
Blues)는 노예해방이 이루어진 19세기 중엽 이후의 것으로, 해방된 흑인들의 비참한 생활 환경, 인간적인 슬픔, 고뇌 ,절망감 등 주를 이루었습니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길거리 술집이나 시장터 축제에서 연주하는 'Blues
Man'들을 통해 여러 지역으로 퍼졌고, 이 음악들은 흑인들의 슬픔과 소망, 그리고 기쁨(모든 감정들)등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독특하게 느린 블루스의 리듬은 백인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 많은 댄스곡으로도
나왔으며, 그러한 음악과 춤에도 블루스(Blues)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2.블루스(Blues)의 역사와
배경
아메리카 흑인들은 19세기 중엽, 링컨의
노예 해방선언에도 불구하고 고통의 생활은 전과 같았습니다. 여전히 가난과 싸워야 했고 생존을 위해서
미시시피 삼각지 목화밭에서 목화를 따야 했던 것이죠. 그리고 인종차별은 어딜 가던지 이전과 같았습니다. 특히 노예해방 이후의 남부에서는 흑인을 노예상태로 잡아두기 위한 여러가지 제도가 성행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음악이 바로 블루스의 시작이 되었다. 해방되었으나
겨우 인간 취급을 받은 데 불과한 흑인들의 비참한 생활환경, 인간적인 슬픔, 고뇌, 절망감 등이 음악속에 잘 묻어져 나온것이죠. 즉 인간성이 완전히 무시된 노예 시대에 비해 약간은 개인적인 생활을 인정받게 된 흑인들의 감정이 묻어난 솔직한
음악표현 이었습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흑인들의 고통과 한으로 빚어진 가슴 아픈 노래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블루스 모두가 슬픈음악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밝고 경쾌한 분위기의 블루스도 있었습니다. 슬픔을 슬픔으로 달래기도 했고, 이와 달리 슬픔을 기쁨으로 달래기도
한 흑인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3.블루스(Blues)의 특징.
l리듬적인 면.
싱코페이션과 3음표를 이용하여 독특한 느낌을 안겨주는데, 약박에 악센트가 들어감으로 인하여 쇼크를 받는 순간과 같은 매우 강한 심리적인 반응상태에서 출발하며 인간은
그에 육체적으로 움직임으로써 보상하는 상태를 불러 일으킵니다. 이러한 블루스의 리듬은 자동적으로 율동을
부르죠. 블루스의 리듬은 역시 흑인 특유의 감정에서 유발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l12마디 블루스(twelve-bar
blues)
가사(시적 구성) 선율구조에 흑인 특유의
특징이 있으며, 그것들은 서유럽음악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아프리카계 민족의 특징을 상실하지 않았습니다. 블루스는 처음 가곡으로서의 형식이 일정하지 않았으나, 이윽고 독자적인 3행시형식의 가사에 의한 12마디의 형식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각 행이 4마디의 프레이즈를 이루고 제1행은 무엇인가를 호소하고, 제2행은 1행을 되풀이해서 강조하며, 제3행에서는
호소한 것에 대한 결론과 결정적인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연 발생적인 민요가 모두 그러하듯이
블루스도 엄격한 법칙에만 얽매인 것은 아닙니다.
l블루스 스케일(Blue Note)
서양 음계는 12음계이고 아프리카 계통 흑인의 음계는5음계인데, 미국 흑인들은 독자적인 음감의 새로운 음계를 창조하였습니다. 유럽 음악의 장조에 비하면 제3음과 제7음이 반음정도 낮아진 독자적인 선법이었죠. 이러한 영향에 의한 스케일을
블루스 스케일이라 하고, 반음 내려진 음계를 블루노트(Blue
Note)라 합니다. 블루스 스케일은 자칫
Pentatonic Scale처럼보일수가 있지만 이 스케일(음계)을 연주할 때 나오는 코드가 마이너냐 메이저냐에 따라 소리의 울림은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플렛3음을 보면 Minor화음
위에서는 코드의 구성음(Chord tone)이지만 메이저 화음위에서는
#9이 됩니다. 바로 이"#9음(플렛3음)"이
블루스를 결정짓는 요소가 되는 것이죠. 또한 Pentatonic에서
오는 "플렛7음"과 4음과 5음사이의 음인 "플렛5음"끼지도 블루스에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음(Note)들입니다.
곧, 종합해보면 1, 2, 플렛3, 4 플렛5, 5, 플렛7 으로
사용되는 블루스 스케일중 플렛3, 플렛5, 플렛7음을 Blue Note라 합니다.
l미시시피 델타 블루스
1910~20년대 등장한 초기의 블루스 뮤지션들은 거의 대부분이 미국 남부지역 출신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블루스의 발원지로 거론되는 미시시피 유역은 거대한 목화 농장들이 모여있던 지역이다 보니 다른 어떤
곳 보다도 블루스의 원류가 되었던 노동요나 홀러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었을 것이고, 이러한 전통이 이들
초기 블루스 뮤지션에게 음악적인 토양을 만들어 주었음은 쉽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미시시피 델타
블루스로 불리기도 하는 초기의 블루스는 컨트리 블루스 혹은 포크 블루스로 불리기도 합니다. 클럽에서
대규모의 빅밴드와 함께 연주하던 스윙재즈와는 달리 대부분의 블루스 뮤지션들은 그냥 떠돌이 악사들 수준이었습니다.
어쿠스틱 기타나 하모니카가 악기의 전부였고 글을 읽거나 쓰기는 커녕 악보조차도 제대로 볼 수 없는 문맹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흑인 인구가 많고, 그들에게
음악을 공급할 가능성이 있는 풍부한 자원을 당시의 레코드 회사들이 그들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습니다. 찰리
패튼, 선 하우스, 블라인드 레몬 제퍼슨같은 뮤지션들이 하나둘씩
레코딩을 시작했고 백인들에게도 블루스의 존재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죠. 미시시피 델타 블루스가
완전한 형태를 갖춘 것은 1930년대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남부블루스의 뮤지션들 중에서도 로버트 존슨의 존재는 후대에 큰 인상을 남겼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의
기타 스타일은 곧이어 탄생할 일렉트릭-시카고 블루스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고, 여자친구에게 독살당하게 되는 비극적인 죽음은 그의 음악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l멤피스 블루스
멤피스는 지역적으로 우측으로는 컨트리의 고향인 Nashville(내쉬빌)과 아래로는 '미시시피 델타', 그리고 위로는
'시카고'등이 포진해 있어, 재즈와 블루스, 컨트리의 영향을 고루 받은 지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멤피스
역시 컨트리블루스가 주된 음악색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멤피스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변의
다양한 음악 도시들로 인하여 음악이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초창기 컨트리 블루스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내쉬빌의 영향을 더 받게 되면서 '로커빌리'와 '컨트리 앤 웨스턴'사운드가
주된 멤피스 지역의 주된 음악으로 등장하게 되고, 블루스의 생체는 많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블루스와 별개로 60년대 들어서 흑인음악진영은 '리듬 앤 블루스(R&B)'를 백인들의 로큰롤에 이양시키고 대신 좀 더 흑인색이 강한 Soul음악을 내놓게 되었습니다.
lJump 블루스
도약을 나타내는 점프 라는 타이틀을 가진 블루스인데, 그럼 느리고 끈끈한 블루스에
도약적인 요소가 가미되면, 혹시 신나는 세미 트롯이나 뽕짝을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꼭그런것은 아닙니다. 점프 블루스는 말 그대로 활기찬 리듬이 두드러진 블루스이다. 기존의 블루스에 셔플리듬의 약통적이고 리드미컬한 요소가 첨가되어 활달하고 경쾌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블루스 입니다. 당시 재즈의 스윙의 영향을 받아 엔터테이너적인 요소가 두드러지고, 익살맞은 내용과 음악 분위기를 연출하는 댄스용 음악이기도 합니다.
lUrban 블루스
시카고, 뉴욕, 디트로이트 같은 대도시에서는
남부의 포크 블루스와는 다른 형식의 블루스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대도시에서 유행하던 스윙 재즈의
스타일을 받아들여 재즈적 취향이 강한 대규모의 블루스밴드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죠. 재즈의 관악기
편성을 받아들임과 더불어 렉타임, 부기우기의 전통을 받아들여 발전한 도시 블루스는 조용하고 사색적인 느낌의
남부 블루스와는 달리 활기차고 격렬한 느낌을 청중들에게 전달했으며, 어반(Uban)블루스의 뮤지션들 중에서도 탐파 레드와 빅 빌 브룬지의 영향력은 막대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재즈적 취향이 배제된 블루스 밴드들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기타와 하모니카를 전면에 내세우고 도시적인 화려함에 포크 블루스의 전통을 접목한 것이죠. 그리고 양자를 모두 포함한 도시 블루스는 곧이어 나타나게 될 시카고 블루스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l일렉트릭 블루스(시카고 블루스)
재즈 기타리스트 찰리 크리스천에 의해 일렉트릭 기타가 도입 된 이후, 블루스 역시
일렉트릭 기타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티 본 워커에 의해 블루스로 도입된 일렉트릭 기타의 사용은
대규모 콘서트 홀에서의 연주가 많아지기 시작한 블루스맨 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죠. 하지만, 고출력 엠프를 동반한 일렉트릭 기타의 사용은 단지 사용되는 악기만 변화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과거 어쿠스틱 기타에서는 사용 할 수 없었던 일렉트릭 기타만의 독특한 주법들이 사용되기 시작되었고, 이는 본격적으로 모던 블루스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블루스에 일렉트릭 기타가 도입된 이후 후대 뮤지션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수 많은 전설적인 뮤지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엘모어 제임스, 머디 워터스, 하울링 울프, 윌리
딕슨, 타 본 워커 등은 로큰롤과 록의 출현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비비 킹, 루더 앨리슨과 같은 인물은 가스펠을 받아들이고 동시에 리듬 앤 블루스의 전통을 극대화함으로써 세련되고 우아한 모던 블루스를 확립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l리듬 앤 블루스(R&B)
최근에 들어와 흑인음악을 통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는 리듬
앤 블루스(줄여서 R&B)는 사실 1940년대의 일렉트릭 블루스를 의미하는
표현이었다. 시카고 블루스가 가스펠적인 요소를 받아들임으로서 탄생한 리듬 앤 블루스는 그 어떤
블루스 보다도 블루스의 전통에 가까운 블루스 음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흑인적인 음악이라는 리듬 앤 블루스가
백인적인 전통이 강한 음악 컨트리 앤 웨스턴과 합쳐짐으로써 인종을 초월한
음악 로큰롤이 탄생한 것은 대중음악사에서 가장 큰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4.로큰롤과 록 음악
대중음악의 형성과정에 있어서 블루스의 가장 큰 역할은 바로 "록의 탄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1950년대 후반, 블루스의 리바이벌과 함께
백인들이 블루스를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블루스 음악을 백인들의 취향에 맞게 가공하면서 록음악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죠. 그런데 블루스 리바이벌과 록음악의 탄생이 이뤄진 곳은 블루스의 발상지인 미국이 아닌 대서양 건너 영국 이었습니다. 시릴 데이비스, 알렉시스 코너, 존 메이욜과 같은 백인 블루스 뮤지션들이
블루스 음악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들의 영향을 받은 롤링스톤스, 비틀즈 , 프리티 싱스같은
밴드들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공공연하게 자신들의 우상이 흑인 블루스맨들과 그들의
음악임을 밝혔고, "브리티쉬 리듬 앤 블루스"로
불리는 영국 특유의 블루스 음악이 록으로 진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편 미국에서는 영국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모여든 히피들이 포크 음악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른바 Acid Rock이라는
약물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음악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죠. 그리고,
곧이어 제니스 조플린이 등장하면서 포크에 국한 되어있던
히피들의 관심은 대번에 블루스 음악으로 확장되었고 비비 킹, 루더 엘리슨 같이 재야에 숨어있던 블루스맨들이 다시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5.오늘날의 블루스
흑인음악의 뿌리이면서, 대중음악의 어머니도 불리는 블루스 이지만,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그 음악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야 할 흑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가장 약한 음악이 바로 블루스 음악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블루스 음악이 상업성이 강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블루스 음악은 여전히 대중음악의 뿌리로서 큰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앞으로 블루스 음악이
어떻게 변화 할지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다양한 변화를 보일 수 있는 블루스
음악의 미래를 지켜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이 글은 흑인음악으로 많이 알고 있는 블랙가스펠 그리고 R&B 소울 등 여러
음악들의 뿌리인 흑인영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올려보았습니다.
1.흑인영가의 기원
미국 흑인을 생각할 때 보통 가장 먼저 떠오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이며, 또 하나는 흑인 영가(Negro Spiritual)입니다. 또 개인적으로는 흑인 노예가 떠오르네요. 지금으로부터 몇 세기전평화로운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에 한 떼의 노예 사냥꾼들이 나타나 흑인들을 무자비하게 잡아갔습니다. 그들은 짐짝처럼
배에 실려 백인 노예상 에게 넘겨졌구요. 이때부터 그들에겐 처참한 노예 생활이 주어질 뿐 인간적 삶은
철저하게 박탈당한다. 그들의 후예가 오늘의 아프리카인 그리고 아메리카인(African American)들입니다.
짐승 같이 그렇게 캄캄한 절망을 바라보며 살아야하는 삶이 그때의 흑인들에겐 삶의 전부였습니다.
때문에 흑인 노예들에게 있어서 현세는 "어서 떠나고 싶은 때"일 뿐이었죠. 그래서 그런지 그들이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위안과 희망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뿐이었습니다. 바이블(성경)이 알려주는 천국 이야말로 어서 가고 싶은 그들의 본향(本鄕)이었던 것이었죠. 칡흙 같은 절망과 비참한 현세에서 그들이 스스로
찾은 위안과 간절한 소망을 담은 노래가 바로 흑인 영가 즉, 오늘날의 가스펠의 모태 인 것이죠.
단지 피부색이 검을 뿐, 그들도 엄연한 인간이라는 사실이 백인들에 의해서 철저하게
무시된 삶. 이러한 비극은 한편으로는 흑인들 스스로에게 자유를 향한 투쟁에 처절하게 나서는 자각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대표적인 흑인영가 "주여 나는
권리를 가졌습니다". 구약성서 시편에서 가져온 이 간절한 절규, 노예의 멍에를 벗기 위한 싸움에서 그들이 외쳤던 이 절규에서 흑인 영가의 음악적, 문학적 메시지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어떤 나라, 어떤 민족의 민요에서도 이러한 절규는 찾을 수 없죠. 바로 이런
특징이 흑인 영가를 이해하는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흑인 노예들의 절망과 고통, 한(恨)과 위안, 그리고 희망이 구구절절 담겨있는 영가들은 입에서 입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구전되어 그들의 생명을 지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 흑인영가는 두 세기를 거쳐오면서
미국의 전역으로 번져갔습니다. 노예의 모진 목숨만큼이나 모질고 강인하게 구전되고 전파되었던 것이죠. 흑인 어린이들은 말과 함께 이 노래를 배우곤 했습니다.
"주님을 찾을 때까지 저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저 위대한 아침이 오고""가라, 모세""내 머리 위를 넘어 하늘의 고통이 보이네""기도할 때마다 나는 성령을 보며 내 마음이 움직입니다""내가
당한 고통 아무도 모르네""깊은 강""Swing
low, Sweet chariot" 등 수많은 흑인 영가들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2.흑인영가의 학문적 연구
흑인영가가 학문적으로 다뤄지기 시작한 것은 1816년과 1821년에 데나 엡스타인이 흑인영가의 기원을 언급한 것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고, 찰스톤 에서 흑인 연구를 다루고 있는 한 기관은 1830년의 보고서에서
독특한 형태의 영가 - 흑인영가라고 부를 수 있는 성가의 존재를 언급습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영가에 대한 학문적인 여러 기록들이 등장하기 시각했습니다.
뉴욕에서 간행되는 주간 기독교 잡지인 '복음전도자 The Evangelist'가 1856년 10월에 최초로 흑인영가에 관한 아티클을 발표했는데 제목이
<흑인의 노래>였습니다. 또한 악보와 더불어 최초로 인쇄된 흑인영가는 1862년 필라델피아의 루시맥킴 양에 의해서 인쇄된 'Roll, Jordan,
Roll'이었습니다. 이어서 1867년 11월에 최초의 흑인영가집이 간행되었는데 '미국 노예의 노래(Slave Song of the United States)'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이 흑인영가집을 출판한 앨런(W.F.Allen)과
웨어(C.P.Ware)와 루시맥킴 개리슨은 미국 남부 여러 지역에서
136곡의 영가들을 수집하였던 것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인 영가는 남북전쟁 당시인 1860년대 까지만 해도 아직은 체계화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것이 체계화된 최초의 작업은
1871년으로 기록되었구요.
네쉬빌의 흑인 대학인 피스크 대학의 주빌리 싱어즈(Jubilee Singers of Fisk University)가 흑인 영가를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 연주하고
악보를 보급하기 시작한 때가 1871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몇몇 성악가들이 그들의 연주회에서 영가를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로
흑인영가는 영국에까지 소개가 되었습니다. 물론 오늘에 와서 이 음악은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음악 언어로
확고한 자리를 잡았을 뿐 아니라 미국 출신의 흑인 성악가들에겐 그 어떤 레퍼토리보다도 소중한 자산이 되고있죠. 아울러
오늘날 세계적인 음악언어로 자리를 잡고 있는 재즈와 가스펠 송에도 뿌리와 같은 흑인영가는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흑인영가는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장르라기 보다는 흑인의 상징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이는
음악에도 영향을 끼졌습니다. 특정한 장르의 특징, 분위기에
머물러 있지 않고 여러가지 느낌이 들 수 있게 그들의 음악 마저 발전이 되었죠. 위의 영상에는 최근
곡이 아닌 예전 곡들이 재생될 것입니다. 한번 여러 곡을 들으면서 이런게 흑인영가였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