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말하는 알앤비 R&B (RHYTHM & BLUSE)


l  알앤비 R&B (RHYTHM & BLUSE) 의 음악적 특징


대부분의 미국 흑인 음악과 마찬가지로 리듬앤 블루스의 다양한 양식들은 재즈 리듬을 바탕으로 음의 굴절, 특히 당김음의 처리와 반음 내려 연주하는 블루스 화음이 뒤섞여 유럽 음악의 영향을 한데 섞은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리듬 앤 블루스의 뿌리는 미국 남부의 시골에서 유행하던 블루스 음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 흑인들의 음악 양식인 블루스가 발전하여 재즈와 리듬 앤 블루스 갈라진 것이죠. 재즈가 유럽의 도시에서 유행하던 백인 음악과 만나 재즈로 발전했다면 리듬 앤 블루스는 유럽의 시골에서 유행하던 음악과 만나 정착된 장르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흑인들이 백인으로부터 가혹한 중노동의 고통에 시달리면서 불렀던 슬픔의 노래 였기에 전체적으로 슬프고도 애절한 리듬과, 멜로디, 가사를 담고 있습니다. 블루스가 발전하여 흑인 교회의 가스펠송으로 분화됐기에 가스펠송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창기 리듬 앤 블루스에 속하는 여러 양식은 3가지 주된 형식으로 구별됩니다. 그중에서 가장 최초의 형태는 레이스(Race)1940년대 후반까지는 `레이스 뮤직'이라고 불리었습니다. 1950년대부터는 백인들에게 까지도 충분한 인기를 모았고, 흑인의 지위도 어느 정도 향상 되었으므로 멸시의 느낌이 강한 `레이스뮤직' 이라는 용어를 `리듬 앤 블루스'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점프 악단'의 양식이었고 제 2차 세계대전에 나타나 가장 먼저 나타나 가장 먼저 사라졌습니다.

 

점프 악단의 특성은 강한 리듬과 흥분된 연주, 샤우트 창법으로 요약됩니다. 이들 악단의 음악은 `두왑시대' (미국에서 1940년과 1950년대 연주 도중에 악기를 입으로 대신하여 내던 소리를 `두왑(Doo-Wop)' 이라 일컬읍니다. 이렇게 목소리로 반주하던 그룹을 `두왑그룹' 이라 하는데 이 부류의 그룹들은 대개가 흑인 빈민들 거주 지역인 뉴욕의 할렘등에서 생겨났으며 열악하게 반주를 담당할 악기도 없이 연주하고 노래 불렀다고합니다.) 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점프악단들은 대부분 1950년대 초쯤 사라졌습니다. 또 하나의 양식은 1940년말 시카고 남부의 바나클럽을 중심으로 태동한 시카고 블루스 무디 워터스, 서니 보이 윌리암슨, 훌린 울프로 대변되는 연주자 그룹들이 소규모로 편성된 악기 - 전자 기타, 전자 오르간, 하모니카, 드럼 - 로 소란 스럽게 연주하는 형태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스펠 양식은 보컬을 중심으로 편성된 연주 형태입니다. 리드싱어가 위 음역을 맡고 코러스가 밑을 바쳐주는 형태로 밑집 화음을 사용하여 거의 가라앉은 분위기의 느린 템포가 뒤따르는 형식입니다.

 

l   모타운의 태동, 상업적 음악으로의 전진

 


비상업적인 흑인 음악으로 이어져 오던 리듬 앤 블루스가 상업적인 흥행 음악의 장으로 자리 를 잡은것은 1960년대 부터였습니다. 뉴욕의 애틀란틱 사운드와 디트로이트의 모타운, 이들 레코드 회사들은 흑인 음악만을 본격적으로 기업화하여 스타를 만들었던 레이블이었습니다.

 

애틀란틱을 대표하는 가수는 맹인 가수 레이찰스. 그는 59 `What i'd Say' 를 히트시켜서 백인들에게 인정받은 최초의 흑인 가수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샘 쿡과 재키 윌슨이 가스펠과 리듬 앤 블루스의 접점에서 히트곡을 양산해 냈습니다.

 

또 하나의 레이블인 모타운은 미국 팝 음악의 역사를 바꿔 놓은 기념비적인 레코드 회사였습니다. 흑인 음악의 대부 베리 고디 주니어는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던 디트로이트의 평범한 흑인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탁월한 음악적 감각과 빠른 두뇌 회전, 사업적 투지를 갖추고 모타운 신화를 준비했었고 스모키 로빈슨, 브라이언 홀랜드, 라몬드 도지에, 에디 홀랜드 등 작곡가를 한데 묶어 이른바 `H.D.H' 팀을 결성, 팝 음악계를 뒤흔드는 히트곡을 양산해내기 시작했습니다. 모타운 최고의 스타는 빈민가 출신의 여가수 다이아나 로즈 가이끄는 슈프림스였습니다. 이들은 `Baby Love', Back in My Arms Again' 등을 히트시키면서 60년대 최고의 여성 그룹으로 군림했습니다.

 

이에 대적한 남성그룹은 모타운 출신의 템테이션스. 이들은 5명의 흑인 멤버가 보여 주는 완벽한 하모니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마빈 게이와 스티비 원도도 모타운이 나은 천재 가수들입니다. 마빈 게이는 모타운에서 가장 돋보였던 천재 가수로 다른 가수들에게 찾아보기 힘든 정교함과 깊이를 갖춘 가수였습니다. 12살때 데뷔앨범을 냈던 그는 아직까지 건재함을 과시 하면서 활동하는 대표적인 흑인 가수였고, 60년대 `For Once in my Life', `Yester Me,Yester You, Yesterday'등을 히트 시켰다.

 

모타운의 마지막 스타는 잭슨 파이브 였습니다. 68년 마이클 잭슨과 자넷 잭슨이 포함된 잭슨가의 다섯 형제들이 첫 싱글 `I Want You Back' 으로 단숨에 빌보드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모타운은 베리고디 주니어의 독단적인 운영으로 많은 작곡가들이 떠나는 바람에 그 신화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모타운은 흑인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레이블로 남았고 미국 팝 음악의 또 다른 변주인 로큰롤을 탄생시키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 역시 흑인 음악의 영향 아래 성장하여 최고의 스타로 성장할 수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 이었습니다. 60년대 리듬 앤 블루스의 중요한 양상 가운데 하나는 흑인 소울의 등장이었습니다.

 

흑인음악의 3대 레이블중 하나인 스탁스가 주도한 이 음악은 흑인의 영혼을 담으려는 음악으로 디름 앤 블루스와 달리 좀 더 흑인적이고 여운이 오래 남는 음악이었습니다. 윌슨 피켓, 제임스 브라운, 오티스 레딩 등이 본격적인 소울 음악으로 시장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67년 히트곡 `I Never Loved A Man' 을 히트 시키면서 최고의 소울 가수로 등장한 아레샤 프랭클린은 불후의 명곡 `Respect' 를 남기면서 소울의 여왕에 등극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열정과 흑인들의 일상을 담아낸 노래말, 강한 리듬과 비트로 이뤄진 그녀의 노래는 소울의 모든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대선배격인 레이 찰스는 그녀를 가리켜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가수" 라고 칭송 했고 여성 백인 가수를 대표하던 제니스 조플린 역시 "최고의 여성" 이라고 그녀를 칭하기도 했습니다.

 

l   70년대 이후, 리듬 앤 블루스를 바탕에 깔고 등장하는 아티스트들

 


70년대 들어 와서는 잭슨 파이브의 인기가 계속 되면서 코모도스, 라이오넬 리치, 퀸시 존스등 대형 가수와 뮤지션들이 줄줄이 활동을 펼쳤습니다. 흑인 6인조 그룹인 코모도스는 아직도 스테디 송으로 불리고 있는 `Three Times A Lady', `Still' 등을 히트시키며 흑인 음악의 계보를 이어갔습니다. 레이 찰스로부터 음악적 영감을 이어 받은 퀸시 존스 역시 70년대 흑인 음악을 주도해 온 아티스트 였습니다.

 

그는 뛰어난 작곡과 편곡 실력으로 기라성 같은 가수들의 음반을 히트 시키면서 단숨에 스타 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앤디 윌리암스, 사라 본, 프랭크 시나트라가 그의 손에 의 해 만들어졌으며, 가수로서도 만만치 않은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You've Got It Bad, Baby' 는 재즈와 소울, 팝차트를 휩쓸면서 최고의 인기곡으로 떠올랐습니다.

 

그가 세운 공적 중에 가장 큰 공적은 마이클 잭슨의 앨범을 제작하여 84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마이클 잭슨으로 하여금 8개 부분을 석권하게 만들었습니다. 잭슨 5의 귀여운 꼬마에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는 마이클 잭슨의 성공 신화는 음악 시장의 흐름을 바꿔 놓은 사건이었습니다.

 

80년대 흑인 음악을 얘기하면서 빼 놓을 수 없는 아티스트 중 하나인 프린스를 얘기해볼까요?  그의 음악은 관능적이고 대담 하면서 성적인 모험과 환상을 불러 일으킵니다. 80년대 초반 연속되는 히트로 미국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떠오른 그는 흑인 음악과 백인 음악의 결합을 추진한 흑인 가수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로큰롤 또는 섹스 로큰롤 로 정의되는 그의 음악은 흑인음악의 흐름을 바꾸는 계기로 작용되었고, `Up Town' `1999' 등 히트곡은 그의 음악성에 대한 경외심까지 느껴지는 곡이기도 합니다.

 

80년대 중반 휘트니 휴스턴의 등장 역시 빼 놓을 수 없는 사건. 90년대 까지 이어지는 그녀의 인기는 리듬 앤 블루스 계열의 수많은 여성 가수들의 전성기를 연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놀라운 가창력으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어 당대를 대표하는 디바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또 자넷 잭슨과 머라이어 캐리, 토니 블랙스턴으로 이어지는 현대 팝 디바 계보의 맨 처음을 장식했습니다.

 

l  이후의 R&B


90년대 들어 리듬 앤 블루스는 속칭 R&B로 불리우며 보다 다양한 변주로 이어졌습니다. 자넷 잭슨과 토니 블랙스턴에서 머라이어 캐리 등에 이르기 까지 R&B 여가수들의 등장은 빼 놓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또 흑인 여성그룹 TLC의 약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들의 배후에는 베이비 페이스 라는 탁월한 아티스트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는 탁월한 프로듀서 감각으로 흑인 음악의 복고 바람과 상업적 성공을 주도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90년대 흑인 음악의 주류는 힙합인데, 50~60년대를 주도하던 흑인 음악의 흥겨움을 이어받은 소위 두왑 시대로 대표되는 그 시대의 음악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힙합은 정통 리듬 앤 블루스 적을 두고 있으면서도 탈장르를 부추기는 현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때 상당한 인기를 얻었던 흑인그룹 퓨지스의 경우는 복고의 경향을 잘 나타내 주는 대표적인 케이스 특히 정통 리듬앤 블루스 리듬을 계승한 보이즈 투 맨 등 여러가지 아티스트 들이 있습니다.

마이클 볼턴과 조지 마이클처럼 백인이면서도 흑인 음악을 구사하는 아티스트들도 있습니다. 소위 블루 아이드 소울 (Blue-Eyed Soul)로 통칭되는 이들의 음악도 리듬앤 블루스의 중요한 변화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뮤지션

 

Supremes - Unchained Melody

 

http://youtu.be/HrxDb8s_yqE

 

Marvin Gaye - What's Going On (Greatest Hits - Live In Amsterdam)

 

http://youtu.be/jzPA-FrVu3I

 

Stevie Wonder - Isn't She Lovely

 

http://youtu.be/b2WzocbSd2w

 

Who's Lovin You - Jackson 5

 

http://youtu.be/J2xc8xZ0tV0

 

Michael Jackson - Beat It

 

http://youtu.be/Ym0hZG-zNOk


퓨전 재즈 : 기존 재즈의 경계를 지워버린 '혼합' 재즈

 

퓨전 재즈는 록, 블루스 심지어 클래식까지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광범위한 음악 형식을 조화롭게 쓰는 것을 일컬읍니다. 1969년 트럼펫 연주자인 마일스 데이비스가 정통 재즈에 록을 접목하여 만든 재즈록에 기원을 둔 퓨전 재즈는 일렉트릭기타, 신디사이저 등 전자 음향의 도입에 이어 최근에는 라틴, 인도음악 등 각국의 민속음악을 접목하는 추세로 발전해 왔습니다.

 

재즈의 역사는 사조들의 변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조는 그 내부에서 끊임없는 새로움을 추구하다가 그 추진력이 소진될 무렵 다시 다른 사조들이 등장하면서 그 지배적 위치를 넘겨주곤 했습니다. 따라서 많은 내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 사조는 독자적인 불변의 정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지배 사조의 개념은 프리 재즈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스윙, 비밥, , 하드 밥으로 이어지는 사조의 흐름이 모두 연주의 방법론에 기인하고 있는 반면, 프리 재즈부터는 기존의 형식을 벗어난다는 커다란 대전제만 있다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조가 바뀔 때마다 존재해 온 '새로운 방식으로 연주하자'라는 생각은 프리 재즈에도 이어졌지만, '이렇게 연주하자' 라는 지배적 방법론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연주자들은 새로운 형식의 연주를 독자적인 사고와 방법으로 현실화시킬 뿐이었습니다.

 

퓨전 재즈 역시 연주방법론보다는 재즈의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사고가 우선시 되는 음악입니다. 이처럼 연주 방식 위주가 아닌 개념 중심의 사조는 모든 혁신적 변화를 사조 안에서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클래식 느낌의 즉흥 연주가 없는 연주와 고도의 즉흥으로만 꾸며진 연주가 서로 상이한 면이 많으면서도 모두 프리 재즈로 분류되는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퓨전 재즈에서도 마찬가지라서, 초기의 록 성향과 집단 즉흥 연주가 강하게 드러났던 연주와, R&B 성향으로 즉흥 연주가 거의 없고 반주마저 프로그래밍하는 연주까지, 모두 퓨전 재즈의 부류에 포함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다면 퓨전 재즈에서 재즈를 구성하는 개념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바로 'Fusion'이었습니다. , 여러 상이한 음악 스타일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재즈를 만들어내는 것이 퓨전 재즈의 기본 원칙인 것입니다.

 

대표적인 뮤지션

 

Birds of Fire - Mahavishnu Orchestra

 

http://youtu.be/gv_bkS5VVaA

 

Mahavishnu Orchestra: One Word

 

http://youtu.be/MtSIEkPqVgk


Return to Forever - The Romantic Warrior 1976

 

http://youtu.be/lObVilGPjHc

 

Weather Report - Birdland

 

http://youtu.be/pqashW66D7o

 

 


Cool Jazz(쿨재즈)

West Coast Jazz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1940년 후반 미국에 나타난 재즈의 양식 중 하나입니다.

 

'Cool'이라는 말은 마일스 데이비스나 모던 재즈 쿼르텟, 게리 멀리간, 레니 트리스태노 등 그들의 음악에서 느껴지는 은근하고 절제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신문 음악평론가들이 이름 붙인 것에서 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부드럽고 은은한 음색에 비브라토는 느리거나 아예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드럼은 밥이나 하드 밥 양식 등 당시의 다른 재즈 양식들에 비해 더 부드러웠고 다른 악기들 과의 상호작용은 더 적었으며 선율을 담당하는 악기들은 대위법적인 집단 즉흥연주를 주고 받는 것에 새롭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이 양식 안에도 감정의 범위나 복잡성의 정도, 악기 편성 등에 있어서는 상당한 다양성이 존재했습니다. ''이라는 말은 로스앤젤레스를 기점으로 한 색소폰 연주자 데이브 펠의 감성적이고 가벼운 음악과 뉴욕을 기점으로 한 피아니스트 레니 트리스태노의 복잡하고 강렬한 음악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쿨 재즈의 녹음 활동과 악보 출판의 경우 백인 재즈 음악인들의 집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여기에는 게리 멀리간과 데이브 부르벡, 쇼티 로저스 등이 참여하였습니다. 이 연주자들은 1950년대초와 중엽에 캘리포니아를 기점으로 해서 활동했으며, 웨스트 코스트 재즈라는 명칭도 여기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연주자들 대부분은 이곳 출생이 아니었고 또한 이곳에서는 아주 잠시 동안만 활동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나 트럼펫 연주자 디지 길레스피의 '' 모던 재즈 양식의 계승자들과 마찬가지로, 쿨 재즈 양식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던 테너 색소폰 연주자 레스터 영이나 쿨 재즈의 개척자 마일스 데이비스의 후계자들도 특정 지역에 집중적으로 모여 활동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백인 색소폰 연주자인 게리 멀리건과 아트 페퍼가 이른바 웨스트 코스트 양식이라는 이름으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이름을 떨치는 동안 텍스터 고든이나 워델 그레이 같은 유명한 흑인 색소폰 연주자들(모두 찰리 파커의 영향을 받은 핫 재즈 양식의 계승자들입니다)도 같은 도시에서 연주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그 당시에 보스턴에서는 색소폰 연주자인 존 파포르타와 트럼펫 연주자인 허브 포메로이가 쿨 재즈 양식으로 연주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서부 연안(West Coast)에서 당시 연주된 모든 양식을 쿨 재즈 양식이라 할 수도 없고, 이 양식이 서부연안에서만 국한된 것이라고도 할 수는 없습니다.

 

 

 

Hard Bop Jazz(하드밥 재즈)

 

1950년 이후 유행했던 재즈 양식입니다하드밥재즈의 음악적 특징은

 


음악형식면에서 클래식을 접합시키는 방법과 감각적 측면은 비슷하지만 음악적 표현이 이전의 비밥(Bebop)을 이어받아 좀 거칠어진 형태를 가진 재즈입니다. 비밥처럼 재즈에 있어서 흑인적인 요소를 더욱 강조함으로써 음향이 거칠고 폭발적이며, 타악기를 강조하고 표현력이 강하며 단순 감각적이고 강렬한 에너지 감을 연주자의 능력에 따라 표출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블루스나 체념하는 형태의 재즈가 아닌 "펑크(Funk)"라고 부르기도 하는 폭발하는 연주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곡

 

쿨재즈


 

하드밥재즈





밥, 비밥(Bop, Bebop)

 

1.    비밥 재즈의 발생

 

""또는 "비밥"이란 단어의 어원은 밥(Bop) 재즈를 노래 부를 때 사람들이 "비비비비 밥밥밥" 또는 "비밥 비밥"하는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라라라"와 같이 뜻없이 곡조에 맞추어 부르는 음절이었던 것이죠. 비밥의 탄생은 흑인 음악가들이 스윙 재즈에서 재즈 특유의 특징이 엷어진 것에 불만, 새로운 스타일의 재즈를 구축한 것으로서 종래의 그 어느 재즈보다도 아프리카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밥 재즈 시대를 연 음악가로는 찰리 파커(Charlie Parker, 색소폰)를 대표자로 들 수 있으며, 밥 재즈는 초기부터 매우 특이하고 독창적인 성격이 강하여 대중의 호응을 받지 못했습니다. 즉 음색이 대단히 강하고 자극적으며, 화음에 있어서도 감화음 이라든가 7, 9, 11도 화음을 사용하였고, 템포는 바른 편이며, 율동감이 별로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와 같이 난해하고 충격적인 비밥 재즈는 예술성이 강하여 예술 음악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비밥 이전의 재즈를 비밥에 대칭된다는 의미에서 전통 재즈 혹은 고전 재즈(Traditional Jazz, Classical Jazz)라고 부릅니다. 

 

비밥 재즈는 예술성은 강하지만 대중에게는 물론이고 재즈 음악가들 사이에도 외면하는 이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방송 출연은 하기도 어려웠고, 레코드 취입은 뒤늦게 1945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비밥이 인기가 없었으므로, 한편으로 전통 재즈인 뉴 올리언즈 재즈를 비롯하여 딕실랜드 재즈 등이 리바이벌 붐을 일으켰으며, 블루스, 스윙에서 파생된 부기우기 등이 그 당시에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비밥 재즈가 예술 재즈로 등장하게 됨으로써 1945년부터는 재즈의 세계도 민요[지방 블루스<land-blues>, 도시 블루스<city-blues>, 대도시의 흑인을 중심으로 하는 리듬과 블루스<rhythm and=" Blues=">, 뉴올리언즈 재즈] [춤과 오락 음악 (딕실랜드<dixieland>, 스윙<swing>), 예술음악(비밥<bebop>)]등으로 분류되게 되었고 각각 그 특징을 살려 계속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2.     비밥 재즈의 음악적 특징

 

비밥 재즈는 전술한 바와 같이 매우 혁신적인 성격을 보여줍니다. 우선 즉흥성이 매우 강하므로 솔로들이 몇명만 모여 만들어진 캄보 밴드(Combo Band)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색소폰, 트럼펫, 피아노, 콘트라베이스, 드럼) 비밥 재즈에서 특이한 점은 피아노가 리듬악기로 등장하여 화음을 받쳐주는 역할을 하고, 드럼은 박자를 짚어주는 리듬악기로서가 아니고 독자적인 리듬 형태를 보유하여 기교적인 면을 강조함으로써 멜로디 악기와 동등한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거친 음색, 현대적인 화음구성과 함께 8분음표 또는 16분음표로 계속되는 빠른 리듬은 광포하며 굉장히 전율적인 것이 특징입니다.

 

 

 

대표적인 음악가로는 찰리 파커(Charlie Parker, 앨토 색소폰), 존 디지 질레스피(John "Dizzy" Gillespie, 트럼펫)와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트럼펫), 텔로니어스 몽크(Thelonius Monk, 피아노)와 버드 포웰(Bud Powell,피아노), 마일드 잭슨(Milt Jackson, 비브라폰), 오스카 페티포드(Oscar Pettiford, 콘드라베이스)와 찰리 밍구스(Charlie Mingus, 콘트라베이스), 찰리 크리스챤(Charlie Christian, 기타), 케니 클락(Kenny Clarke, 드럼)과 맥스 로치(Max Roach, 드럼)등이며, 시기는 1940년에서 1955년까지로 보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뮤지션

 

Charlie Parker - All the things you are

 

http://youtu.be/UTORd2Y_X6U

 

Jazz Classics: Dizzy Gillespie - A Night In Tunisia

 

http://youtu.be/BQYXn1DP38s

 

Blue in Green by. Miles Davis

 

http://youtu.be/PoPL7BExSQU

 

Max Roach at his best

 

http://youtu.be/cS-xiX64HGQ

 

 


재즈를 이야기할 때 꼭 들어가는 이 말 스윙. 빅밴드와 같은 재즈음악의 대부분은 이 스윙이 들어가 있습니다. 음악과 춤 이 두가지가 꼭 들어가는 신나는 재즈음악 스윙. 이번편에는 스윙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1.    스윙(Swing)이란

스윙(Swing) : 흔들리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스윙의 특징은 율동감입니다.

 

이러한 율동감을 위해서 이전까지의 2박자 재즈가 아닌 4박자 연주가 주류를 이루게 되는데, 스윙의 4박자는 1,2,3,4를 그냥 나열하는식 이 아닌 “~~~~” 하면서 'and'에 악센트를 줌으로써 기존 연주에 강한 율동감을 유도하는 형식이었다고 합니다.

 

EX)1-2 and 3-4 and

 

대부분 스윙 스타일 그룹들은 적어도 10명의 멤버로 구성 되었으며 적어도 3.4개의 섹소폰, 2,3개의 트럼펫, 2,3개의 트럼본, 피아노, 기타, 베이스, 드럼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폭발적인 업비트의 리드미컬한 특성을 갖는 음악으로 노래에 따라서 우아하게, 또는 그루브하고 펑키하게 표현하는데, 풍부하고 호소력있는 빅밴드 스윙음악은 청자의 감상이나 흥미정도에 따라서 표면적으로 고양 시킬수도 있고, 또 심지어 내면을 움직이게도 합니다.

 

스윙이 성장하게 된 데에는 미국 경제의 호전과 더불어 대중매체의 발달 역시 한 몫 했다는 점이 간과해선 안 될 중요 요인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해서 대량으로 보급된 라디오와 영화 등은 그동안 클럽과 연주회로만 겨우 접할 수 있었던 재즈 뮤지션들을 일반화 했는데, 바로 이때 바람과 같이 나타난 사람이 베니 굿멘(Benny Goodman)입니다. 파산 직전이었고, 무명이며, 백인(당시 거의 모든 유명 재즈 연주자는 흑인)이었던 클라리넷 연주자 베니 굿맨'Let's Dance' 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그의 빅밴드와 함께 연주했는데 이 음악이 엄청난 히트를 칩니다. 그 이후의 미국 음악은 거의 모두가 이런 신나는 음악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스윙 음악은 주로 댄스홀에서의 반주로 주로 쓰였습니다. 처음에 스윙에 관심이 없던 다른 재즈 거장들도 하나 둘씩 스윙의 물결에 동참하게 되고, 결국은 모든 재즈가 스윙으로 통하게 됩니다.

 

물론 스윙이란 음악 장르가 갑자기 튀어나온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많은 밴드들이 연주했던 거지만 본격적으로 이때부터 대중들에게 어필하게 된것이죠. 이때의 거장으로는 베니 굿맨, 토미도시(Tommy Dorsey, tb),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p),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 p), 글렌 밀러)Glen Miller, tb)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빅밴드를 이끌며 그야말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고 특히 이중에서 듀크와 카운트는 음악성과 대중성에서도 최고의 인기빅밴드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 두 사람은 재즈 역사상 최고의 인물들 중 하나로 일컬어 집니다. 그리고 유명한 빌리 할리데이 라는 가수가 이시기에 데뷔해서 듀크나 베니, 카운트의 빅밴드와 함께 노래했다고 합니다. 이때가 빌리 할리데이의 전성기였다고 합니다.

 

이 시대의 연주는 주로 커다란 클럽에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빅밴드가 연주를 하고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무희들은 춤을 추고, 관객들은 술을 마시는 사교클럽 과 같은 분위기지요. 이때의 클럽은 대부분 연주자와 종업원들은 흑인이고 손님들은 모두 백인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인종차별이 아직 남아있었다는 것을 이런 배경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백인이 튀기 힘든 재즈계에서 베니 굿맨은 특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스윙 붐을 일으켰기 때문에 '스윙의 왕' 이라고도 불렸었고 재즈 뿐만아니라 클래식에도 조예가 깊어 바르톡, 스트라빈스키 등이 그를 위해 곡을 만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스윙 시대에 최고의 빅밴드를 꼽으라면 모두가 듀크 엘링턴을 꼽습니다. 최고의 음악성과 대중성으로 30년대 재즈계에서 최고의 명인이라고 불린 인물입니다. 이후에도 듀크 엘링턴만금 재즈 역사에 영향을 끼친 사람이 몇 안되었습니다. 듀크 엘링턴은 50여년간 활동하면서 무려 1000장이 넘는 정규 레코드를 발매했다고 하고, 3000곡이 넘는 작곡을 했다고 합니다. 또한 많은 인기 연주자가 듀크 엘링턴의 밴드 출신인 것으로 유명합니다.

 

 

빅밴드 그리고 스윙재즈는 많은 사람들이 연주를 하기 때문에 편곡이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보통 곡은 테마 - 솔로 - 테마의 구성으로 이루어집니다. 한곡에는 미리 정해진 솔로 연주자가 있고 나머지 멤버들은 테마 부분에서는 집단적인 연주를, 솔로부분에선 솔리스트를 돋보이게 해주는 배경 연주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편곡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거죠.

 

 

2.    스윙감(Swing Feel) 이란?



흔히 재즈뮤지션들(특히 보컬리스트)을 언급할 때 "그 사람은 스윙감이 없어" 혹은 "그의 연주엔 스윙감이 가득해" 같은 표현을 종종 접하곤 하는데, 스윙 외에 재즈의 다른 장르들은 이런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쿨감(Cool Feel) 이라거나 밥감(Bop Feel) 이라는 표현은 쓰질않죠. 이런 스윙감이란 용어가 재즈필과 거의 같은 뜻으로 통용되는 데에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설은 스윙의 대중적 인기, 그리고 전세계, 다른 장르의 음악에 미친 영향에 따른 이유가 있기도 합니다


즉 블루스형식의 곡 구조와 싱코페이션으로 대변되는 전통적인 재즈의 틀을 고수하며 세계의 일반대중에게 어필한 재즈의 하위 장르는 스윙이 최초이며 이로 인해 재즈 전반에 대한 대표성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대표 뮤지션

 

SING, SING, SING" BY BENNY GOODMAN

 

http://youtu.be/r2S1I_ien6A

 

Duke Ellington - It don't mean a thing (1943)

 

http://youtu.be/qDQpZT3GhDg

 

COUNT BASIE Swingin' the Blues, 1941 HOT big band swing jazz

 

http://youtu.be/TYLbrZAko7E

 

 

 


시카고 재즈(Chicago-Jazz)


1.     시카고 재즈의 발생 그리고 발전


 


1917,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뉴 올리언즈가 중요 해군기지로 지정되어 스토리빌의 업소들이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곳에서 일하던 많은 음악가들이 해고를 당하여 이들 중에는 미시시피강을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 세인트루이스(St. Louis), 캔자스(Kansas), 시카고(Chicago) 등으로 이주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도시들 중 시카고는 특히 1920년대부터 재즈가 활발히 꽃피기 시작한 도시로서, 루이 암스트롱, 죠 킹 올리버, 키드 오리, 젤리 롤 모튼 같은 이들이 뉴 올리언즈에서 시카고로 이주하여 활동한 대표적인 음악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시카고에서 새로운 연주법을 구사하여 "시카고-뉴 올리언즈 재즈" 스타일을 구축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루이 암스트롱은 시카고에서 20년대에 "핫 파이브(Hot Five)" "핫 세븐(Hot Seven)"밴드를 조직하여 뉴 올리안즈 스타일로 연주하다가, 30년대에는 그 당시 시카고의 유행대로 자신의 트럼펫 솔로 연주와 노래가 큰 역할을 맡고 그의 밴드는 뒤에서 반주만 하는 스타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스타" "쇼맨"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40년대에는 "올 스타즈(all Stars)"악단을 조직하여 다시 뉴 올리안즈 스타일로 되돌아 가기도 했습니다


루이 암스트롱과 버금가는 유명한 음악가는 피아니스트 젤리 롤 모튼 이었습니다. 그는 크레올 출신으로 음악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으므로, 테마를 작곡하고 또한 이를 편곡하여 그의 밴드를 연습시켰습니다. 그의 악단의 특징은 즉흥연주의 폭이 훨씬 적었던 탓에 당시 재즈 동료들에게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시카고에서는 재즈의 세계에 백인이 진지하게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 또한 획기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백인 고교생과 대학생들 사이에 재즈는 신선한 음악으로 받아들여져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으며, 이들 가운데 "어스틴 하이스쿨 갱(Austin High School Gang)"과 같은 모교 이름을 본딴 유명한 밴드와 빅스 바이더벡(Bix Beiderbecke, 트럼펫)같은 훌륭한 연주가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과거의 딕실랜드 재즈와는 달리 진정한 재즈 세계를 탐구하여 그 당시 백인의 취향인 "스위트 뮤직 (Sweet Music)"을 침투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들의 음악적 특징은 테마 작곡과 편곡을 역시 오선지에 철저하게 적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흑인악단보다 즉흥연주가 적으며, 솔리스트의 활약이 전체적인 밴드연주보다 앞서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음악은 흑인의 연주보다 약간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2.     시카고 재즈의 음악적 특징

 

시카고 재즈의 전성기는 대략 1925년에서 1930년까지로 추정되며, 뉴 올리언즈 출신의 흑인 음악가들은 시카고에서 좀더 고상하고 세련되고 노련하게 스타일을 바꾸어 나갔습니다. 이들은 또한 뉴올리언즈 재즈 음반 제작을 이곳에서 실행했습니다(1923-1928). 시카고 재즈는 이러한 유래로 말미암아 뉴 올리언즈 스타일과 흡사한 점이 많지만 그 특징을 끄집어 내자면 아래와 같은 점이 있습니다.

 

(1) 합주에 대응하는 솔로의 즉흥연주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집단 즉흥연주는 쇠퇴되었다.

(2) 멜로디 악기들이 제각기 횡적으로 즉흥연주를 하기보다는 화성적으로 맞추게 되었다.

(3) 벤죠와 튜바보다 기타와 콘트라베이스를 즐겨 연주하였다.

(4) 악센트를 제2, 4박에 두어 스윙감을 더했다.(뉴 올리안즈 시대의 2박자 재즈에서 4박자 재즈로 옮겨와 약동감이 더해지는데 이를 '스윙'이라고 한다. 4박자 재즈의 최초의 공로자는 루이 암스트롱이다)

 

 

대표적인 뮤지션

 

BUNK JOHNSON - Sister Kate


http://youtu.be/oY3Go5Ydeao

 

King Oliver's Creole Jazz Band - Dippermouth Blues (Sugarfoot Stomp) 1923


 

http://youtu.be/J-HJI464CVs

 

 

 

 

What a wonderful world - LOUIS ARMSTRONG


 

https://www.youtube.com/watch?v=A3yCcXgbKrE 

 



뉴 올리언즈 재즈(New Orleans-Jazz)

 

1.     재즈의 정의 그리고 뉴 올리언즈 재즈의 발생

 

보통 재즈의 발생지를 루이지애나주에 위치해 있는 도시 뉴 올리언즈로 보는 것은 재즈가 초기에 가장 활발히 연주되던 대표적인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재즈는 어느 시기, 어느 곳에서 발생한 음악이라고 단정짓기 보다는 흑인 노예제도가 성행한 이래로 수십년 동안 점차적으로 발전된 음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재즈라는 이름을 갖게 된 시기나 그 어원도 정확히 알 수가 없으나 흑인 영가, 블루스, 노동요 등은 미국적 민요에 유럽의 민요나 오락음악, 군악대 음악의 기법을 첨가하여 전문 음악가들이 연주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재즈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Civil War,1861-1865)이후에 군대에서 악기를 불하 하여 악기가 시중에 많이 퍼지게 되었고, 프랑스인과 흑인 노예의 혼혈인 크레올(Creole)이 대거 참가하여 많은 악단이 생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크레올은 피부가 흑인보다 밝고, 교육을 받았으며, 프랑스어로 말을 하였다고 하는데, 경제나 사회적으로 흑인보다 우세 하였으므로 노예해방 이후(1865) 흑인들에게서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흑인의 단순한 형태의 음악에 유럽적인 기법이 침투하게 되었으며, 악기편성은 군악대편성에서 차차 소편성의 밴드중심으로 나아가긴 하였으나 여전히 취주악기가 그 주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재즈의 특징으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크레올과 흑인들은 길거리나 공원, 결혼식, 장례식, 피크닉, 카니발 등에서 연주를 하였으며, 1900년대에는 댄스홀이나 술집에 고용되어 연주를 하였습니다. 특히 뉴 올리언즈의 홍등가인 스토리빌 (Storyville)에서는 랙타임 피아니스트와 소편성 밴드를 고용하여 손님을 접대하였으므로 흑인 음악가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초기에는 재즈란 이름으로 연주한 것이 아니나, 최초의 재즈밴드로 알려진 것은 버디 볼든(Buddy Bolden- 트럼펫, 코르넷)의 밴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곧 백인들이 모방하여 댄스음악으로 연주하는 악단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는데(1910년 경부터) 이들 중에서 니크 라 로카(Nick La Rocca,트럼펫)가 이끄는 "오리지날 딕실랜드 밴드(Original Dixieland Band)" 1917년 최초로 레코드 취입을 하여 재즈가 드디어 미국 전역으로 퍼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뉴 올리언즈 재즈의 음악적 특징

 

뉴 올리언즈 재즈는 1900년에서 1925년 사이가 전성기이고, 대표적인 음악가로는 버디 볼든(Buddy Bolden, 트럼펫), 벙크 존슨(Bunk Johnson, 트럼펫), 죠 킹 올리버(Joe King Oliver, 트럼펫),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트럼펫), 키드 오리(Kid Ory, 트럼본), 젤리 롤 모튼(Jelly Roll Morton, 피아노), 그리고 백인 밴드로 "오리지날 딕실랜드 재즈 밴드(Original Dixieland Jazz Band)" "뉴 올리언즈 리듬 킹즈(New Orleans Rhythm Kings)"등이 있습니다.

 

악기 편성은 백인의 군악대를 본 따왔기 때문에 멜로디 악기로 트럼펫, 클라리넷, 트럼본 등의 관악기를 편성하고, 리듬악기로 드럼, 벤조, 기타, 튜바, 그리고 피아노, 콘트라베이스가 추가되어 구성을 이룹니다.

 

연주 형태는 흑인 음악가들이 악보를 읽을 줄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순전히 청력에 의해 연주하는 경향이 짙어졌습니다. 이들은 12마디의 블루스나 32마디의 노래나 랙타임을 주제로하여 각 구성원이 제작기 동시에 즉흥적으로 연주하였으며 이를 가르켜 "집단 즉흥 연주(Collective improvisation)"라고 일컫습니다. 리듬 형태는 단순한 2박자(한 마디에 2박이 들어가고 첫박에 악센트가 있다) 재즈가 성행하였습니다.

 

이 시기의 재즈 특징은 시대가 변하여도 영원한 재즈의 특징으로 전승되게 된 요소들이 많은데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블루음표 (Blue Notes)

(2) 거칠은 음색 (dirty tones)

(3) 억세고 폭발적인 억양법 (hot-Intonation)

(4) 기본 박자를 무시한 리듬과 악센트 (off beat, swing)

(5) 주어진 테마로 즉흥연주 (Improvisation)


뉴 올리언즈 재즈 음악감상



재즈이야기1. 랙타임(Ragtime)

 




1.    랙타임(Ragtime) 이란?

 

랙타임이란 재즈를 낳은 여러 요소중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미국에서 유행하고, 1910~1915년에 그 절정을 이루었던 미국의 대중 음악 양식을 말합니다.

 

화성은 장,단조의 1, 5, 4도 화음이고 왼손 반주부는 2박자, 오른손은 예리한 싱코페이션을 가진 멜로디를 연주를 합니다. 이 음악 형태는 이름 자체만 들었을 때는 매우 낯설게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우리들이 많이 들어본 친숙한 음악이기도 하지요. 1973년에 스팅(sting)이란 영화에 쓰여 매우 유명해진 곡인 엔터테이너:The Entertainer가 대표적인 예 입니다.

 

랙타임은 피아노 독주곡으로 째즈가 자리잡기 전의 초기 스타일을 지칭하나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습니다. 그러나 랙타임이 째즈던 아니던 째즈의 발생에 많은 영향을 준 것만은 사실입니다. 'Ragtime'이라는 이름은 'Ragged Time'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여기서 Ragged란 말은 단어 자체로는 'Uneven(정확히 들어맞지 않은)'이라는 의미로 사실 서양적인 싱코페이션(syncopation)과는 조금 다릅니다. 음표들을 정확히 박자와 박자 사이에 놓는 것을 서양적 싱코페이션 이라고 한다면 이들을 박자보다 조금 앞이나 뒤에 놓는 것이 바로 랙타임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Ragged의 일반적인 효과는 멜로디를 정규 박자에서 벗어나게 하여 마치 그것이 박자와 박자 사이에 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겁니다. 이는 복합적인 리듬을 가진 아프리카의 드러밍에서 기원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늘날 랙타임의 전형이라고 보이는 것들은 사실 오랫동안 발전된 여러 가지 형태의 음악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후대 사람들은 고전적인 피아노 랙타임만을 기억하는데 이는 고전적 피아노 랙타임이 째즈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반면에 랙타임 노래들은 후 대중음악의 전통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랙타임은 피아노의 측면에서 볼 때 19세기 유럽음악을 흑인들의 리듬 감각과 역동적인 연주방법을 반영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백인 연주자들도 흑인 연주자 못지 않게 뛰어난 ragtime 연주자들이 많아서 음악만 들어보아서는 누가 흑인이고 누가 백인인지 구분하기 매우 어려웠다고 합니다.

 

Ragtime이 널리 퍼지게 된 때는 '랙타임의 황금기(Golden Age of Ragtime)'였던 1900년 대부터 세계 제1차 대전 전까지, 오늘날 랙타임의 아버지(King of Ragtime Writers)로 불리우는 Scott Joplin, James Scott, Joseph Lamb에 의해 그 고전적인 형태가 확립되게 되었습니다. Joplin'AABBACCDD'로 표현되는 랙타임의 구조와 형태를 확립하여 대다수의 랙타임 작곡가들이 그 형태를 따르고 있습니다.

 

 

2.    랙타임(Ragtime)과 뮤지션이야기

 


RAGTIME의 역사는 대표적인 연주자인 Scott Joplin의 삶 속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Joplin이 뛰어난 랙타임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Joplin은 그 합류점이 Euphonic Sounds로 발전한 여러 요소들을 직접 경험하였기 때문이죠. 이는 세기말 미국 뿐만 아니라 유럽인들에게도 음악적인 즐거움을 안겨다 주기도 했습니다.

 

랙타임의 탄생은 일반적으로 첫 랙타임 곡이 발표된 날로 정하고 있습니다. 1895 Ben Harney Louisville에서 "You've Been a Good Old Wagon"을 발표하였구요, 이 사람이 훗날 New York City에서 랙타임을 대중화시킨 사람입니다. instrumental ragtime 1897 1월 발표된 William Krell "Mississipi Rag"이었습니다. 그러나 흑인 instrumental ragtime이 출판되기 시작한 것은 1897년 말 Tom Turpin "Harlem Rag"이 발표되면서 부터 였습니다. 이미 행진곡과 왈츠곡들을 발표한 적이 있던 Scott Joplin 1899 Original Rags를 발표하였습니다.

 

하지만 Ragtime의 역사를 단지 출판된 곡들로만 비추어 보는 것은 오해를 일으킬 소지가 많습니다. 이 관점에서 랙타임의 탄생을 보면 백인이 랙타임을 확립시킨 선구자였고 최고의 랙타임은 출판된 형태로만 존재하였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흑인들은 Krell의 오케스트라 이전부터 랙타임을 연주해 왔고 이를 통해 받은 팁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출판가들이 그들의 생동적이고 율동적인 곡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때 조차도 그들은 술집이나 무대에서 연주를 해 받은 팁으로 충분한 돈을 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을 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랙타임 곡의 첫 출판이 랙타임의 탄생을 말하는 것이라면, 정교하고 명랑한 대부분의 랙타임 곡들이 단지 작곡가 자신들 또는 소수의 즐거움을 위해 무대 뒤에서 연주되었던, 긴 임신 기간이 있었던 셈이죠.

 

랙타임의 음악적 뿌리는 미국 플랜테이션 생활 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멋진 옷을 입은 커플들이 춤을 주고 그 중 최고의 커플이 케익을 차지하는 Cakewalk가 그들이 즐긴 놀이 중 하나였습니다.

 

l  대표적인 뮤지션

 

스콧 조플린(Scott Joplin), Piano, Composer


 

1865 12 24일 텍사스주 출생 1917 4 11일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킹 오브 랙타임>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로, 어렸을때 피아노를 독학하였다.


11살때 독일인 피아노 교사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10대에 고향을 떠났습니다. 1885년부터 '93년까지 세인트루이스에서 살면서 음악활동을 하였구요. 로컬 캬바레와 살롱에서 연주를 하였고 1894년부터 시카고로 이주하여 연주하였습니다. 같은해 '텍사스 멜로디 쿼텟'이라는 자신의 밴드를 결성하여 자신의 곡을 소개하기 위해 미 국내를 돌아다니면서 연주를 하였습니다. 이후 1896년 조지 스미스 칼리지에 입학하여 랙타임에 대한 연구를 하기도 했구요. 그 후 자신이 직접 랙타임을 구사하기 시작하였고, 그의 랙타임은 세들리아의 홍등가에서 히트되기 시작했습니다.

 

3년뒤에는 랙타임 오페라 < 더 게스트 오브 오너 >가 만들어졌지만 출판되지 못했습니다. 그때 작곡된 랙이 후에 유명해진 < 이지 위너즈 >, < 엘리트 싱코페이 션 >, < 디 엔터테이너 >입니다.

1907년에는 세인트루이스, 시카고를 거쳐 뉴욕으로 진출, 로티 스톡스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조플린은 곧 매독으로 쓰러지고 1910년에는 연주가 불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감추어 은둔생활을 하였고 오랜 기간 친구였던 출판업의 스타크와도 로얄티 문제로 절교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후 죽기까지 3곡의 랙을 작곡하였고 랙타임 오페라 < 트리모니샤 >도 마지막 수년간을 소비하며 작곡하였습니다. 1915녀에는 마지막으로 시험삼아 오페라를 위해 프로덕션 기금을 만들었지만 누구에게도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고 자신의 건강도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계속될 수 없었습니다.

1916년에는 맨하튼의 워즈 아일랜드 병원에 입원, 다음해인 1917년 에이프릴 풀에서 생일 마갑했습니다. 말년에 녹음된 조플린의 연주는 음도 엉망이고 상당히 부끄러운 음악들 이었습니다.

'70년대 영화 < Sting >의 주제곡으로 다시 리바이벌된 < The Entertainer >의 인기로 다시 스콧 조플린의 랙타임 연주들이 붐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Maple Leaf Rag Played by Scott Joplin 


 

http://youtu.be/pMAtL7n_-rc

 

'Original Rags' SCOTT JOPLIN (1899) Ragtime Piano Roll Legend

 

http://youtu.be/3ybSmkyDjZI

 

Scott Joplin-The Entertainer


http://youtu.be/AShLpRFhV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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